<첫사랑의 침공>-권혁일
표지가 눈에 띄어서 집었는데 제목이 <첫사랑의 침공>? 첫사랑이 외계인은 아니겠고 외계인이 지구를 침공하는 충격만큼 내 삶에 들어온 거겠지?라는 생각으로 책을 읽었는데...
내용이야기를 하기 전에 출판된 곳 이야기부터 하고 싶다. 이 책이 출판된 곳은 안전가옥이다.
안전가옥은 <칵테일, 러브, 좀비>로 처음 접한 출판사였는데 다른 책도 보니 주로 판타지, sf, 스릴러 쪽으로 특화되어 있는 곳 같다. 안전가옥은 출판만 하는 것은 아니고 신인 작가를 발굴하고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동시에 영화 각색 작업, 드라마 제작 협업 등 콘텐츠를 만들어내는데 힘쓰고 있다. 그래서 스스로를 ip프로덕션이라고 칭한다.
안전가옥 안에서는 다양한 브랜드를 두고 출판하고 있는데 <첫사랑의 침공>이 속한 브랜드는 쇼-트 시리즈다. 쇼트는 말만 들어도 알겠지만 단편 및 경장편으로 구성된다. 경장편은 200자 원고지 500~600매 정도 되는 분량의 책인데 단편보다는 길고 장편보다는 짧아서 요즘 트렌드에 맞다고 한다. 단편은 아쉽고 장편은 너무 길어 손이 안 가니.
쇼트 리스트를 쫙 보는데 독특한 제목과 그에 맞는 표지라 하나씩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첫사랑의 침공>
요약
외계선이 지구를 침공했다. 수많은 외계선 중 하나가 비무장지대에 착륙했고 곧 예비군이 소집되었다. 서고 누나는 성윤의 대학교 동기다. 첫 만남에 서고에게 반한 성윤은 이후 서고를 맴돌고, 둘은 가까워진다. 어느 날 서고는 성윤에게 바다를 보러 가자고 하고 그곳에서 엄청난 고백을 한다. 서고는 외계인이고 자신의 종족인 이둘렛니들이 지구에서 적응할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보내진 것이란 걸. 고백 이후 사라진 서고를 그리워하던 성윤은 서고를 만나기 위해 자진하여 비무장지대로 들어간다.
인상 깊은 문장
아마 누나는 몰랐을 것이다. 그 짧은 대화가 나에게는 얼마나 큰 충돌이었는지. 나는 파르르 떨리다가 훅 불어온 눈웃음에 나가떨어져, 공중에 아무렇게나 휘날리기 시작했다. (중략) 나는 계속 팔랑팔랑 나부꼈다.
몸은 점점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고, 간지럽지만 어디를 긁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답답함에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전투복 틈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스며들고, 6년 전과 똑같은 그 오묘한 느낌이 가슴을 후벼 판다. 그 근처에서 붉은 액체가 뿜어져 나오는 것을 보니, 감정이 마침내 몸통을 뚫고 나간 듯하다.
감상
엥 진짜 주인공이 외계인이었다. 제목을 온전히 담은 편이라는 생각. 첫사랑이 사랑이라는 무기를 가지고 나의 마음을 침공한다. 성윤의 심리 묘사가 세세하여 그의 기분이 같이 느껴졌다. 의성어 의태어도 좀 나왔던 것 같은데 그게 감정이랑 연결이 잘 되었다. 한편으로는 첫사랑이 뭐길래라는 생각도 했지만 성윤은 첫사랑을 뛰어넘을 만한 사랑을 해보지 않아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외계인이라도 만나려 뛰어가는 성윤을 보니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에서 최한결이 하는 말이 생각난다. "네가 남자건 외계인이건 이젠 상관 안 해."
<세상 모든 노랑>
요약
구영은 노란색이 갈색으로 보이는 증상을 가지고 있다. 시각 디자인 전공인 랑은 졸업 작품으로 노란색 테마가 들어있어야 한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고 안과를 가지만 별다른 해결을 찾지 못한 채 나온다. 그 순간 노란빛을 뿜어내는 노란색의 신을 본다. 우연한 계기로 노란색의 신의 손을 맞잡은 영은 세상 모든 노란색을 보게 된다. 노란색의 신은 하위 계급의 신이라 무시를 받았지만 자신을 신으로 인정해 주는 영이 좋았다. 둘은 영의 졸업 작품을 계기로 자주 만나고, 영은 노란색의 신에게 노랑에서 딴 '랑'이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랑도 영의 도움을 받으며 노란색에 이름을 입힌다.
서로가 바빠지면서 만나는 시간이 짧아지고 설상가상으로 랑은 영의 졸업 작품 전시회를 잊는다. 시간이 흘러 영은 취업을 하고 랑은 좋은 평가를 받게 되어 더욱 바빠진다. 영은 노란색을 지각하지 못해 회사에서 질책을 당하고, 곁에서 위로해줄 랑도 없다. 힘들어진 영은 크리스마스 저녁에 랑에게 이별을 고한다. 어느 겨울, 영은 교통사고를 당할 뻔하고 랑이 구해준다. 랑은 영을 신의 세계로 데려가 자신의 노란색의 정원을 보여준다. 둘은 정원에서 완전한 이별을 한다.
인상 깊은 문장
영이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색깔이었지만, 보자마자 그것이 노란색임을 알 수 있었다. 수백만 년 동안 마법의 솥에서 끓여 낸 물약에 폭 담갔다 빼낸 것처럼 신비로운 색이었다.
세상의 모든 다른 색은 사라진 듯, 오직 노란색만이 저마다의 온도로 반짝이며 빙글빙글 돌았다. 노란색은 따뜻하고 부드럽고 시큼하고 향긋했다.
영은 노란색의 신과 정면으로 눈을 마주쳤다. 신의 눈동자 또한 머리칼처럼 찬란한 노랑으로 빛났다. 영의 귓가에 치이익 도화선이 타들어 가는 소리가 울렸다. 노란색 스위치가 당긴 불이 어느새 눈에서 마음으로 옮겨 붙은 것이다.
매일, 매분, 매초가 저마다의 노랑으로 반짝였다.
감상
노란색. 참 기분이 좋은 색이다. 일단 봄이 연상되어서 시작하는 느낌도 들고 밝고 유치원에 주로 쓰니까 순수한 면도 있고 계란과 바나나가 생각나서 맛도 있는 색. 노란색을 만드는 신과 노란색을 모르는 인간의 만남! 이런 걸 뭐라 부르지? 보완 관계? 어쨌든 이후 이야기가 예상이 되었지만 신도 승급하려면 대회에 출품하고 이런 세세한 컨셉이 있어서 재밌었다. 특히 각양각색의 노란색을 너무 잘 표현했고 노란색의 중요도 알게 되었다.
이 단편은 건강한 이별이란 무엇인지 알려주는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오해한 일, 미안했던 일, 헤어지더라도 말해주고 싶은 일 등 허심탄회하게 말하는 것. 결국 이별로 끝나지만 이런 만남 뒤에 성장한 자신이 있다는 것.
마지막이 아쉽긴 하다. 영과 랑만 등장하면 좋았을 텐데 굳이 이름 붙인 인물을 등장시킨 이유는 무엇일까? 이름 붙은 사람이 많은 소설은 상관없는데 단편은 등장인물 자체가 적기 때문에 약간 요런 부분을 주의 깊게 보는 편이다ㅋㅋ그리고 이 소설은 영이 랑의 이름을 지어주면서 훨씬 가까운 사이가 되어서 명명의 특별함도 생각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는 영이 노란색이 보이지는 않지만 세상엔 언제나 노란색과 랑이 존재함을 상기하는 장치로 사용한 것 같다. 수현의 등장이 마음에 안 들어서 그냥 생각해 봤다.
<광화문 삼거리에서 북극을 가려면>
요약
여섯 살 때 아버지와 광화문에서 헤어져 보육원으로 들어간 서현. 스무 살 생일날까지 아빠를 기다렸으나 아빠는 오지 않았다. 열아홉 살 때 서현은 중고 맥북을 샀는데, 그곳으로 알 수 없는 메시지가 왔다. 메시지를 보낸 것은 카뎀 48번이라는 행성에 살고 있는 메로. '우연한 계기'로 그 맥북과 연결되어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메시지를 보냈지만 답장을 보낸 지구인은 서현뿐이었다. 이후부터 서현과 메로는 메시지로 소통하며 친구가 되었다.
서현이 스무 살이 되던 해 이둘렛니라는 외계 종족이 지구를 침공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하게 바이러스가 퍼져 이둘렛니 종족은 지구를 버리고 떠났다. 서현은 사전에 메로의 조언을 들어 살아남게 되었고, 메로는 서현을 보러 지구로 온다. 서현과 메로는 가고 싶었던 지구의 곳곳을 누빈다. 즐거운 여행도 잠시, 서현은 테이티엄-0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건강이 급속도록 나빠졌고 메로는 서현의 건강을 위해 시간을 되돌리기로 결심한다.
인상 깊은 문장
"나는 서현을 만나러 왔어"
여섯 살에 멈춰 버렸던 내 시간이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구가 다 바스러지고 난 후에야 나는 혼자가 아니게 되었다.
"이 지구에는 없더라도, 저렇게 크고 넓은 우주 어딘가에는 나를 좋아해 줄 존재가 하나쯤은 있을 거라고 언젠가는 저 별들을 다 헤치고 나에게 날아와 줄 거라고."
"어쩌면 그보다 더, 훨씬 더 적을 수도 있어. 하지만 지금의 우리도 결국 그런 확률을 뚫고 만난 거야. 0%가 아니란 사실이 중요해. 조금이라도, 정말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다면 모든 일은 일어날 수 있어."
"꼭 ···다시 나를 찾아올 거야?"
"응, 꼭. 어떻게든. 모든 은하를 가로질러서라도."
감상
제목이 뭔 말일까 했는데. 지구가 박살이 났는데 그게 이둘렛니 종족의 침공이라니. 첫 번째 이야기와 연결되어 있어서 재미있었다. 보면서 <프로젝트 헤일메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메로와 로키는 선한 마음, 우정-사랑을 소중히 여기는 특징이 닮은 외계인이다. 로키가 좀 더 똑똑하지만ㅋㅋ 다른 점은 메로는 정말 아무도 없다는 것.
혈혈단신 메로와 서현의 진한 구원 이야기가 좋았다. 아버지를 매번 기다리던 서현이가 이제는 메로와 같이 기다릴 수도 있고, 아버지가 오지 않아도 절망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둘이 꼭 북극도 같이 가보길. 서현이는 외롭게 컸을지언정 부족하게 자라진 않은 것 같다. 자신의 거짓말이 들킬 위험에 처하자 솔직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고, 자신이 죽고 나면 메로가 혼자 남을까 봐 걱정하고... 이런 마음은 귀하다.
<하와이안 오징어 볶음>
요약
홍민정은 북에서 보낸 첩자다. 신분 위장을 위해 자신에게 구애하던 직장 동료 김정훈과 결혼한 지도 6년이 되었다. 어느 날, 첩자 노릇을 그만두고 자신을 키워준 북한 사람 박철태를 만나기 위해 하와이로 가기로 한다. 민정은 차마 남편을 정리하지 못하고 당에도 쫓긴다. 정훈의 안위를 위해, 그리고 도주의 편리를 위해 정훈을 계속 떼어 놓으려고 하지만 악착같이 쫓아오는 정훈을 뿌리치지 못한 채 데리고 간다.
인상 깊은 문장
"(전략) 그 빌어먹을 오징어볶음만 아니었으면 ···."
"오징어볶음이 왜? 맛없었어?"
"더럽게 평범한 맛이야. 그걸 먹을 때마다 내가 어땠는지 알아? 밥 한 공기를 더 먹을까, 말까 하는 생각뿐이었어. 더 먹자니 그렇게까지 맛있을 것 같진 않을 것 같고, 또 안 먹자니 이따 생각날 것 같고. 당장 내일 사람을 죽여야 할지도 모르는데, 그러다 내가 죽을지도 모르는데 ··· (중략) 2년 전에는 떠났어야 했는데, 빌어먹을 너랑 빌어먹을 오징어볶음이 내 발목을 잡은 거야. 고작 그까짓 게."
"근데 당신이 원하는 게 평범한 삶이라고? (중략) 특별한 건 주지 못하더라도, 우리가 평범하게 살 수 있도록 내가 죽어라 노력해 볼게."
"간첩 남편답게 경찰차를 슬쩍한 것뿐이야!"
감상
무슨 이런 사람이 다 있어? 뭐랄까 이 이야기만 sf요소가 없는데 제일 믿기지 않는다. 나는 남자에 대한 기대가 없나 보다. 김정훈이라는 인물보다 외계인이 더 그럴싸할 것 같음. 엉뚱하고 흐물텅거리면서 맹목적인 사랑을 보여준다. 종이 인간 같은 느낌도. 배경은 첩보액션인데 정훈이가 흐물렁 방방 거려서 찰싹 붙진 않는 느낌이다. 근데 작가의 말을 보고 이해가 확 되었다. 신혼이셨구나.
전체적으로 무해한 사랑이 주제였던 것 같고 상대를 위해서는 모든 걸 내줄 수 있는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가볍게 볼 수 있는 사랑 소설.
개인적 선호도
세상 모든 노랑 > 광화문 삼거리에서 북극을 가려면 > 첫사랑의 침공 > 하와이안 오징어 볶음